하워드 혹스의 '베이비 길들이기'(1938)를 처음 볼 때마다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8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혁신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캐리 그랜트와 캐서린 헵번이 펼치는 광기 어린 코미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듯하다.
영화는 겉보기에 단순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공룡 뼈대를 완성하려는 학구적인 고생물학자 데이비드(캐리 그랜트)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자유분방한 수전(캐서린 헵번)의 만남. 그러나 이 단순한 설정은 혹스의 손에서 놀라운 변주를 거친다.
혹스가 창조한 코미디의 세계는 완벽한 통제와 완벽한 혼돈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다. 모든 것이 무질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교하게 계산된 카오스다. 마치 재즈 즉흥 연주처럼, 혼돈 속에 숨겨진 정교한 구조가 있다.
데이비드의 캐릭터는 당시 할리우드의 남성성에 대한 흥미로운 전복을 보여준다. 캐리 그랜트는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와 학자적 진지함을 코믹한 효과로 활용한다. 특히 그가 수전의 잠옷을 입고 "난 갑자기 미쳐버렸어요!"라고 외치는 장면은, 전통적인 남성성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헵번이 연기하는 수전은 1930년대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녀는 단순한 매력적인 히로인이 아니라, 스스로의 규칙으로 세상을 재편하는 카오스의 화신이다. 그녀의 논리는 비논리적이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일관성이 있다.
'베이비'라는 표제의 이중적 의미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의 표면적 서사에서 그것은 표범을 가리키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수전이 데이비드를 '길들이는' 과정을 암시한다. 이는 당시의 젠더 관계에 대한 영리한 은유가 된다.
영화의 대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닌, 인물들의 심리적 상태와 관계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특히 데이비드와 수전의 대화는 마치 정교한 언어적 체조와도 같다.
공간의 활용도 매우 흥미롭다. 박물관, 저택, 감옥 등 각각의 공간은 점차 무질서의 영역으로 변모한다. 질서의 상징인 박물관에서 공룡 뼈대가 무너지는 장면은, 이성과 규율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물들의 존재는 영화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한다. 표범 '베이비'와 테리어 조지는 단순한 소품이 아닌, 인간 세계의 질서에 대한 자연의 도전을 상징한다. 특히 표범은 억압된 본능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대변하는 존재다.
혹스의 연출은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는 깊은 복잡성이 숨어있다. 카메라는 대부분 인물들의 눈높이에서 움직이며,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 광기 어린 상황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편집의 리듬도 주목할 만하다. 혹스는 코미디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각각의 개그는 정확한 순간에 터지며, 이는 영화 전체의 리듬과 조화를 이룬다.
'베이비 길들이기'가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이 영화는 당시의 관객들에게는 너무 앞서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는 젠더 관계의 전복, 사회적 질서의 해체는 1938년의 관객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영화의 가치는 더욱 분명해졌다. 특히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이 영화는 매우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수전이라는 캐릭터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파괴적이면서도 창조적인 도전을 보여준다.
영화가 다루는 이성과 감성의 대립도 흥미롭다. 데이비드가 상징하는 과학적 이성은 끊임없이 수전이 대변하는 비이성적 감성의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이 둘의 조화 가능성을 암시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영화의 언어적 유희다. 대사는 단순한 의미 전달의 수단을 넘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형식이 된다. 오해, 중복, 동음이의어의 활용은 언어의 불안정성과 커뮤니케이션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영화의 의상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데이비드가 입게 되는 여성의 잠옷, 수전의 자유분방한 복장은 모두 당시의 젠더 규범에 대한 도전을 시각화한다.
음악의 사용도 독특하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음악은 최소화되어 있으며, 이는 대사와 상황의 코믹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혹스는 이 영화를 통해 스크루볼 코미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사회적 규범과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영화의 결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공룡 뼈대의 붕괴는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닌, 낡은 질서의 필연적 몰락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을 암시하기도 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베이비 길들이기'는 놀랍도록 현대적인 작품이다. 젠더 정체성의 유동성, 제도화된 권위에 대한 도전, 사랑의 혁명적 가능성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들이다.
이 영화가 현대 관객들에게도 강력한 매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보여주는 해방의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통제되고 규격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 영화는 질서의 파괴가 가진 해방적 잠재력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베이비 길들이기'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넘어서는 복잡한 예술적, 사회적 함의를 가진 작품이다. 그것은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당대의 사회적 규범과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반향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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